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칼라스 (문단 편집) === 1960년대 ===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크리스티나호에 처음 초대받았을 때, 얼마나 돈이 많은 사람이길래 이렇게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살 수 있나 하고 놀라워 했지만 정작 오나시스와 동거하게 되자 오나시스는 칼라스에게 강아지 두 마리를 선물한 것 말고는 돈을 쓰는 일이 없었다. 1960년부터 칼라스는 EMI에서 음반 녹음 활동을 재개했고 계약이 파기됐던 이탈리아의 라스칼라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계약을 다시 맺고 메데아와 토스카등을 공연했다. 덕분에 EMI에서 스테레오의 음질로 칼라스의 여러 녹음이 남기게 되었다. 다만 목소리가 예전 같지는 않았기에 평론가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칼라스의 이름값만으로 판매량은 보장되었다. 1963년경 오나시스는 미국 대통령의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 리 라지윌 자매에게 동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나시스의 관심은 리 라지윌, 재클린 케네디 자매에게로 옮겨갔다. 하지만 오나시스의 복잡다단한 여자 관계에도 불구하고 칼라스와 오나시스 사이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1964년경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집에서 나와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죽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하지만 파리로 이사한 것이 오나시스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나시스가 보유하고 있던 6채의 자택 중 하나가 파리에 있었다. 파리는 이탈리아나 미국과 달리 대중들이 유명인들의 사생활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오나시스와 칼라스가 만남을 갖기에는 가장 좋은 도시였다. 1964년 칼라스는 연출가 제피렐리와 함께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에서 '[[토스카]]'로 근 5년만에 다시 오페라 무대에 복귀했다. 팬들은 여전히 환호했고 흥행도 성공했지만 평론가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미 목 상태도 예전같지 않아 거의 재활 훈련 급으로 강한 발성 연습을 거듭하며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가사의 발음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출연하는 작품은 토스카, [[노르마]] 단 두 개로 제한되었다. 칼라스는 1년여 동안 런던 코벤트 가든, 파리 국립 오페라,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토스카와 노르마를 돌려가며 공연했다. 하지만 결국 1965년 7월 5일에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한 토스카가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출연이 되었다. 원래는 5회 반복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7월 5일 1회만 공연하고 나머지 4회는 다 취소되었다. 하지만 칼라스 본인이 은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오페라에 출연하기 위해 여기저기 타진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1966년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희망하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그리스는 법으로 그리스정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혼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메네기니와의 결혼은 취소됐다. 하지만 오나시스는 끝까지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1967년 런던 코벤트 가든 측과 라 트라비아타 공연에 대한 교섭이 오갔고, 8월부터 한달간 그녀의 파리 자택에서 코벤트 가든 측이 보낸 피아니스트와 연습했지만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68년 5월, 이번에는 코벤트 가든 측과 무대 공연은 못하더라도 스튜디오에서 라 트라비아타 음반 녹음이라도 해보자하는 이야기가 오갔고 역시 코벤트 가든 측이 보낸 피아니스트와 함께 파리 자택에서 일주일 넘게 연습했다. 하지만 오나시스와의 관계 때문에 도중에 중단되었다. 아마도 이때 칼라스가 오나시스와 재클린과의 깊은 관계를 알아챈게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다. 1968년 9월 칼라스는 갑자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찾아가 공연을 마친 레나타 테발디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포옹하고 역사적인 화해를 했다. 칼라스가 갑자기 테발디를 찾아간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칼라스가 대중들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관계자들 앞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일깨움으로써 오페라 무대에 복귀하려 했던 시도였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왕성하게 활발하고 있던 테발디보다도 한 살 어린 자신이 결코 은퇴할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려 했다는 것. 사실 칼라스가 테발디를 찾은 것은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의 결혼 계획을 눈치챈 직후로 보여진다. 오나시스는 재클린과의 결혼 계획을 심지어 재클린의 친동생인 리 라지윌에게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가 결혼하기 한 달 전부터 지인들에게 재클린과의 결혼 계획을 알리기 시작했다. 칼라스가 테발디를 찾아간 날로부터 딱 한 달 후에 오나시스는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다. 참고로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함께 살던 집도 뉴욕에 있었다. 오나시스가 가진 저택 6곳 중 세 곳이 뉴욕에 있었다. 나머지는 칼라스가 살던 파리, 그리고 섬, 요트였다. 오나시스와의 관계는 1968년 10월 오나시스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 결혼식을 올리면서 끝나...지 않고 나중에 다시 이어진다. 어쨌거나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결혼을 올리며 오나시스와의 관계는 한동안 잠정 중단되었고 칼라스는 홀로서기에 나서야 했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결혼한 지 석달 만인 1969년 초 칼라스는 파리 스튜디오에서 EMI와 함께 음반 녹음 세션을 가졌다. 이것은 1965년 7월 토스카 공연에서 1회 출연 후 잔여 공연을 캔슬한 후 4년만의 첫 음악 활동이었다. 그러나 음반 1~2개 분량의 녹음 세션이 진행된 것으로 끝났고, 다시 칼라스의 음악 활동은 다시 잠정 중단되었다. 이것은 1973-74년 투어를 제외하고 공개된 그녀의 마지막 음원이며, 오리지널 오케스트라 반주를 동반한 연주로는 마지막이었다. 이후 영화 출연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1969년 여름에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와 '공주 메데아'라는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평은 좋지 않았고 여배우로서의 커리어도 이것이 시작이자 끝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